역린逆鱗- 분노의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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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마인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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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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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대학교 신문에 연재한 글입니다.)
역린逆鱗- 분노의 심리학
역린은 왕만이 표현할 수 있는 고유한 분노다.
“권력은 부자父子 사이에도 나눌 수 없다”고 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정조正祖(현빈扮)의 아버지는 사도세자思悼世子다.
사람들은 정치적인 동물이지만 흔히 말하길 “정치는 피도 눈물도 없이 비정하다”고 한다.
역린은 이런 정치적인 세계를 하루라는 시간으로 축소시켜 실감나게 표현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뒤를 이어 조선을 통치할 지위에 있었지만,
친아버지의 명령으로 27세 때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했다.
세자는 매우 총명하여 만 2세 때부터 글자를 알았다고 한다.
신체적 조건과 무예도 뛰어나서 병서를 즐겨 읽었고 어릴 때부터 군사놀이를 하면서 놀았다.
무예에 대한 세자의 열정은 저술로도 이어져 약관 24세에는 무기신식武技新式이라는 책을 엮어 내기도 한다.
이런저런 연유로 볼 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정조(현빈)의 활솜씨는
아버지의 피를 이어 받은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하겠다. 그
러나 사도세자의 아버지인 영조는 아들의 이런 무인적인 기질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형조판서 이종성李宗城을 세자시강원의 빈객으로 임명하면서
세자의 강인한 성품을 인자함으로 조화롭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이미 미래를 향한 진로의 관점에서부터 부자간의 갈등이 시작되고 있다.
아버지의 교육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도세자는 심신쇠약과 피해망상적인 증상을 보이며 불행한 삶을 마무리하게 된다.
역사서에는 “정축년과 무인년 뒤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 발작할 때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였고, 죽인 뒤에는 후회하곤 했다.
임금이 그때마다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는 두려워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 사도세자와는 달리 정조는 뛰어난 우등생이었다.
단지 우등생이 될 수밖에는 없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치적인 탄압 때문이었다.
그는 반대파의 끝없는 암살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새벽까지 잠을 줄여가며 독서를 했다.
고난의 시절에도 독서를 통해 자신의 밝은 미래를 준비한 것이다.
정조는 왕이 되고 나서 그 감회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었다.
“내가 밤잠을 안자고 독서하다가 새벽닭이 울고 나서야 잠자리에 든 것이 몇 날 몇 밤이던가.”
호화로운 캐스팅을 자랑하는 역린을 완벽하게 즐기려면, 조선의 왕가와 세도정치의 역사를 먼저 탐구해 보는 것이 좋다.
세상살이가 이미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이 영화의 높은 완성도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영화 속에서는 정조 역을 맡은 잘생긴 배우 현빈이 크게 분노하는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실제적으로도 정조는 한평생 마음속에 응어리진 분노를 해결하지 못하고 화병火病에 시달린 기록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그는 자신이 정성을 다해 키우던 신하 정약용이 강진의 귀양처에서 그랬던 것처럼
차茶를 항상 옆에 두고 마시며 화를 가라앉혔다.
차茶가 가진 약성인 차가운 기운을 빌어 분노를 다스리려한 것이다.
심리적으로도 지나치게 화를 억누르면 분노조절장애를 야기할 수 있다.
분노가 가진 위험성은 지나친 파괴력이다.
이것이 자신을 향하면 최악이 경우 자살로 이어지며 상대방을 향해 표출되면 극단적인 살인에 이르기도 한다.
분노를 지나치게 억누르면 감정 또한 무감각해지고 무기력과 우울증을 호소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가 지속되면 삶에 흥미를 못 느끼고 헛것을 보거나 다양한 심리적인 고통이 동반한다.
요즘은 조선시대와는 달리 분노에 대한 학문적인 관심으로 연구가 많이 진척되어 있어,
심리적인 치료기법 또한 다양하게 발달해 있다.
사실 심리상담의 현장에서 많이 접하는 문제가 분노로 인한 다양한 정신증의 출현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종교적인 신념 또는 유교적인 사상으로 인해 개인의 감정을 억누르게 하는 예의문화가 지배적이다.
때문에 감정표현이 자유롭지 못해서 많은 문제점으로 표출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영화가 보여주는 역린의 짧은 하루는 정조가 승리하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나지만,
사실적인 역사기록 속의 정조는 49세라는 젊은 나이에 급사했다.
역린逆鱗- 분노의 심리학
역린은 왕만이 표현할 수 있는 고유한 분노다.
“권력은 부자父子 사이에도 나눌 수 없다”고 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정조正祖(현빈扮)의 아버지는 사도세자思悼世子다.
사람들은 정치적인 동물이지만 흔히 말하길 “정치는 피도 눈물도 없이 비정하다”고 한다.
역린은 이런 정치적인 세계를 하루라는 시간으로 축소시켜 실감나게 표현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뒤를 이어 조선을 통치할 지위에 있었지만,
친아버지의 명령으로 27세 때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했다.
세자는 매우 총명하여 만 2세 때부터 글자를 알았다고 한다.
신체적 조건과 무예도 뛰어나서 병서를 즐겨 읽었고 어릴 때부터 군사놀이를 하면서 놀았다.
무예에 대한 세자의 열정은 저술로도 이어져 약관 24세에는 무기신식武技新式이라는 책을 엮어 내기도 한다.
이런저런 연유로 볼 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정조(현빈)의 활솜씨는
아버지의 피를 이어 받은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하겠다. 그
러나 사도세자의 아버지인 영조는 아들의 이런 무인적인 기질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형조판서 이종성李宗城을 세자시강원의 빈객으로 임명하면서
세자의 강인한 성품을 인자함으로 조화롭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이미 미래를 향한 진로의 관점에서부터 부자간의 갈등이 시작되고 있다.
아버지의 교육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도세자는 심신쇠약과 피해망상적인 증상을 보이며 불행한 삶을 마무리하게 된다.
역사서에는 “정축년과 무인년 뒤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 발작할 때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였고, 죽인 뒤에는 후회하곤 했다.
임금이 그때마다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는 두려워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 사도세자와는 달리 정조는 뛰어난 우등생이었다.
단지 우등생이 될 수밖에는 없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치적인 탄압 때문이었다.
그는 반대파의 끝없는 암살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새벽까지 잠을 줄여가며 독서를 했다.
고난의 시절에도 독서를 통해 자신의 밝은 미래를 준비한 것이다.
정조는 왕이 되고 나서 그 감회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었다.
“내가 밤잠을 안자고 독서하다가 새벽닭이 울고 나서야 잠자리에 든 것이 몇 날 몇 밤이던가.”
호화로운 캐스팅을 자랑하는 역린을 완벽하게 즐기려면, 조선의 왕가와 세도정치의 역사를 먼저 탐구해 보는 것이 좋다.
세상살이가 이미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이 영화의 높은 완성도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영화 속에서는 정조 역을 맡은 잘생긴 배우 현빈이 크게 분노하는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실제적으로도 정조는 한평생 마음속에 응어리진 분노를 해결하지 못하고 화병火病에 시달린 기록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그는 자신이 정성을 다해 키우던 신하 정약용이 강진의 귀양처에서 그랬던 것처럼
차茶를 항상 옆에 두고 마시며 화를 가라앉혔다.
차茶가 가진 약성인 차가운 기운을 빌어 분노를 다스리려한 것이다.
심리적으로도 지나치게 화를 억누르면 분노조절장애를 야기할 수 있다.
분노가 가진 위험성은 지나친 파괴력이다.
이것이 자신을 향하면 최악이 경우 자살로 이어지며 상대방을 향해 표출되면 극단적인 살인에 이르기도 한다.
분노를 지나치게 억누르면 감정 또한 무감각해지고 무기력과 우울증을 호소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가 지속되면 삶에 흥미를 못 느끼고 헛것을 보거나 다양한 심리적인 고통이 동반한다.
요즘은 조선시대와는 달리 분노에 대한 학문적인 관심으로 연구가 많이 진척되어 있어,
심리적인 치료기법 또한 다양하게 발달해 있다.
사실 심리상담의 현장에서 많이 접하는 문제가 분노로 인한 다양한 정신증의 출현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종교적인 신념 또는 유교적인 사상으로 인해 개인의 감정을 억누르게 하는 예의문화가 지배적이다.
때문에 감정표현이 자유롭지 못해서 많은 문제점으로 표출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영화가 보여주는 역린의 짧은 하루는 정조가 승리하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나지만,
사실적인 역사기록 속의 정조는 49세라는 젊은 나이에 급사했다.
어린 시절에 이미 아버지의 죽음을 접했고,
끊임없는 암살의 위험 등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스트레스 기록들을 모아 유추해 본다면
쇠약해진 마음에 몸도 따라간 것 같다.
꺼져가는 조선의 국운에 정성을 다하고,
사력을 다해 살려보려 했던 미완의 개혁군주
정조의 죽음이 아쉬운 것은 이 때문이다.